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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보라, 질문하라, 반항하라, 사랑하라 by meongseog

                                   2007. 멍석작 / 도란도란 (종이에 수묵, 담채)

 


 

 

@ 바라보라, 질문하라, 반항하라, 사랑하라 / 이원

 

  1 −바라보라, 세상에서 처음 만나는 풍경처럼

 

 

  우리는 매순간 본다. 무엇인가를 보지 않는 시간은 거의 없다. 심지어는 눈을 감고 있을 때에도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거나 꿈이라는 이미지를 통해 본다. 장님은 보지 못한다. 장님에게 거울을 건넸다고 하자. 우선 장님은 그것을 만져볼 것이다. 냄새도 맡아보고 입에도 대어볼 것이다. 눈이 닫힌 대신 다른 감각을 동원하는 것이다. 눈이 닫혀 있기 때문에 다른 감각은 눈을 뜬 우리보다 훨씬 예민하다. 한 예로 장님 안마사들의 손이 예민한 것은 눈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그만큼 다른 감각은 예민해진다.

   그렇다면 우리는 정말 보고 있는 것일까. 혹시 보이기 때문에 아무 것도 보고 있지 않은 것은 아닌가. 그러나 눈뜨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보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은 아닌가. 더욱 아무 의심 없이 보고 있다고 믿기 때문에 다른 감각까지 예민해지지 않는 지경은 아닌가.

   어린 아이들과 어른이 보는 것의 차이는 무엇일까. 같은 풍경을 보아도 아이들은 신기한 것이 많다. 어린 아이일수록 더 그렇다. 이 세상에 와서 처음 보는 풍경이 많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풍경에 대한 실용적 정보가 없거나 적다. 아이들 앞의 풍경이라는 것은 그 뜻 그대로 그냥 펼쳐져 있는 것이다. 고정관념이 없으니 자신이 감각하는 대로 본다. 자신이 생각하는 대로 믿는다. 모든 엄마들은 자신의 아이가 다 시인이라고 믿는다. 이 말은 맞다. 모든 아이는 시인이다. 어린 아이들의 시선은 장님의 손과 같다. 아이들의 상상력이 기발하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그만큼 우리 어른들이 고정관념에, 일상적 시선에 길들여져 있다는 증거다.

   우리는 보는 것을, 관찰하는 것을 너무 가볍게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가 흔하다고 치부해버리는 그 흔한 풍경 속에 새로운 언어가 들어 있다. 진정으로 볼 수만 있다면 우리는 모두 자신만의 언어를 발견하고 만들어낼 수 있다! 진부한 것은 풍경이 아니라 고정관념에 길들여진 우리의 눈이다. 우리는 우리의 관습화된 눈이 가리고 있던 벽을 걷어내고, 그 풍경을 있는 그대로 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처음 보는 풍경처럼. 그것도 골똘히 들여다보는 것이다. 그 풍경이 말 걸어올 때까지 오래 들여다보는 것이다. 처음 보는 신기한 풍경을 스쳐지나갈 리는 없다.

   눈에 맺히는 풍경이 있다면, 그것이 버스정류장 앞을 구르는 깡통 하나든, 불 꺼진 책상에서 꼬리를 길게 늘이고 있는 납작한 마우스든, 그 풍경은 당신의 무의식 주파수와 맞은 것이다. 그 사실 하나를 믿고 그 풍경을 계속 들여다봐라. 이 세상에서 처음으로 맞닥뜨린 풍경처럼. 어린아이의 눈으로 들여다보라. 장님의 손처럼 들여다보라. 그 풍경이 자신의 내부를 열기 시작할 것이다.  

 

 

 

   2 −질문하라, 한 번도 묻지 않았던 것처럼

 

 

   어느 풍경이 당신의 눈에 들어왔다고 하면 당신의 주파수와 풍경의 주파수가 맞은 것이다. 즉 감각이 맞은 것이다. 그러므로 감각을 믿어라. 감각은 무의식의 영역이며 시 쓰기에는 무의식이 강하게 작용한다. 우리의 몸은 우리가 경험한 것을 기억하는 저장소이다. 우리는 시간이 지나도 어떤 인상을, 경험의 정서를 기억한다. 이미지로 전환시켜 기억한다.

   처음 보는 풍경이라고 여긴다 해도 그 풍경에는 이미 우리가 살아온 만큼의 기억과 정서로 덧입혀져 있다. 이것에서 기억과 정서를 벗겨내기란 쉽지 않다. 어느 정도 기억을 지웠다고 해도 그 풍경의 뒤가 또는 안이 가진 비밀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보고 난 뒤 모든 것을 질문하라. 내가 보는 그 풍경을 질문하라. ‘저것은 전봇대가 아닐지 몰라. 꽃은 아름다운 것이 아닐지 몰라.’라고. 그렇다면 ‘꽃은 만개하는 것이 아니라 곧 사라질 죽음이다. 죽음의 절정이다’라는 사유가 가능해질 것이다.

   마침표를 물음표로 바꾸어라. 모든 느낌에 사유에 물음표를 붙여 묻고 또 물어라. 반문하라. ‘저거 의자 맞아? 저거 구름 맞아?’라고. 거꾸로도 보라. ‘의자에 내가 기댄다.’를 의자의 입장으로 거꾸로 바꾸어 보라. ‘의자가 나를 버텨내고 있다’로 바뀐다.

   시는 언어를 가지고 하는 놀이다. 똑같은 대상이 있다고 해도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은 모두 다르다. 이 말은 대상이 새로운 것이 아니라 보는 관점이 새롭다는 것이다. 정면에서 바라보면 얼굴이 보이지만 뒤에 가서 바라보면 뒤통수가 보인다. 관점이 달라지면 새로워진다. 새롭게 바라보니까 새롭게 써진다. 그러므로 매순간 어린아이의 눈을, 장님의 손을 갖도록 해야 한다. 그 눈에는, 그 손에는 물음표가 달려 있다.  

 

 

 

   3 −반항하라, 결코 받아들이지 않을 것처럼 

 

 

   마르셀 뒤샹은 권위 있는 전시에 남성용 변기를 가져다놓고 ‘샘’이라고 제목을 붙였다. 1917년의 일이다. 자신이 생각해도 순순히 허용되지 않을 것으로 판단되었던지 한밤중 갤러리에 가져다놓았다. 전시가 시작되자마자 미술계는 발칵 뒤집혔다. ‘변기라는 일상적이다 못해 점잖지 못한 물건을 신성한 공간에 버젓이 갖다 놓다니. 더욱이 창작의 과정을 거치지도 않은 기성품을 자신의 작품이라고 갖다놓다니, 이것은 모독이다. 예술가의 가장 기본적인 태도인 창작이라는 권리이자 의무를 저버린 것’이라며 분노했다. 찬반양론으로 들끓었다. 쟁점이 된다는 것은 문제적이라는 뜻이다.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문제적이지 않다면 쟁점이 되지 않는다. 몇 십 년이 흐른 후에 이 논란은 ‘샘’을 ‘레디메이드’라 칭하며 ‘미술 혁명’이라는 평가를 내려주었다.

   뒤샹의 변기가 단순한 변기가 아닐 수 있게 한 것은 다름 아닌 그의 철저한 반항(!)이다. 즉 ‘작가가 직접 그려야만 창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가? 아주 보잘 것 없는 일상적 물건은 예술이 될 수가 없는가?’라는 반항이 전복적 세계를 가능하게 한 것이다. 변기라는 기성품을 작가가 선택하고 그것을 ‘샘’이라고 명명하는 순간, 그것은 일상적 사물에서 예술 작품으로 변화하게 된 것이다. 그때까지 예술은 예술가 자신의 고유한 것, 무엇인가 고상한 것, 일상적이 아닌 특별한 것이라는 관념이 일반적이었다. 뒤샹은 그 고정화된 주류 질서를 변기 하나를 통해 통렬하게 뒤집어 보인 것이다. 그래서 문제적이다. 이러한 비딱하게 보는 뒤샹의 반항 정신이 물꼬를 튼 이후 현대 미술은 진화한다. 워홀은 마릴린 먼로, 캠벨통조림 같은 상업적 대상을  대량생산 개념까지 도입해 실크스크린으로 인쇄한다. 유명작가의 작품의 좋은 부분만 따서 매번 그림을 완성시키는 공인된 훔치기 전문 화가도 있다.

   뒤샹은 용감한 사람임에 틀림이 없다. 그의 모험이 성공한 것은 결과다. 그가 모험을 감행할 때 성공과 실패의 확률은 반반이었다. 그는 그가 지금까지 쌓았던 모든 것을 다 잃을 수 있었다. 뒤샹이 가진 한 가지의 믿음은 잃을 것을 두려워하지 않은 것이다. 모험은 잃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때 가능하다. 모험을 하는 사람은 반항한다. 그러면서 자신이 가고 싶은 방향으로  간다. 처음 가는 길이니 당연히 충돌한다. 왜 이런 것은 시로 쓰면 안되는가, 왜 이런 것은 문학이 되지 않는가, 그 안된다고 생각하는 그 자리에서 새로운 세계가 탄생한다. 내가 믿는 그곳이 내 세계다. 용감해져라. 파도가 겁난다면 결코 선원이 될 수 없다.

 

 

 

   4 −사랑하라, 꿈에도 헤어지지 않을 것처럼

 

 

   사랑에 관한 관념은 달콤하다. 환상적이다. 하트가 상징하듯 부드럽고 따뜻하다. 그렇다면 사랑의 실재는 어떠한가. 달콤하기도 하지만 맵기도 하다. 따뜻하기도 하지만 따뜻한 만큼 춥기도 하다. 환상적이기도 하지만 누추하기도 하다. 그래서 사랑은 귀한 것이다. 사랑은 지속되는 것이다. 즉 사랑은 따뜻하지만 않기 때문에 계속 되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또 내내 춥지만도 않기 때문에 계속 된다는 말이기도 하다. 

   사랑이 관념에서 실재로, 즉 다른 누군가의 사랑에서 내 사랑으로 바뀌는 것은 울고불고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랑을 끝내 포기하지 못하는 것은 ‘그리고’가 아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에 있는 것이다. 그 누구도 내 것이 아니라면 울고불고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혹시 울고불고 하기 전에 그 대상과 헤어지는 일을 자주 반복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언어도 마찬가지다. 내가 쓰고 싶은 것이 있다면 어느 순간에도 함께하라. 울고불고해라. 울고불고한다는 것은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포기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지독한 사랑이다. 울고불고하는 것의 기본 조건은 단시간이 아닌 상당한 시간이다. 함께 하는 시간이 길수록 그것에 밀착된다. 그것의 여러 모습이 저장된다. 울고불고했는데 결과적으로 얻어진 게 없다고 해서 허무해하지 말라. 우리는 단지 잠을 좀 덜 잤을 뿐이다. 조금 더 고통스러워했을 뿐이다. 정말 그뿐이다.  

   사랑의 위대함은 유용성이 아니라 무용성에 있다. 물론 현실적인 잣대가 들어간 사랑도 있지만, 사랑이 위대한 것은,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조적의 상태에서의 마음, 그 무용성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이다. 현실적인 기준으로 보자면, 어디 쓸 데가 없는 것이 사랑이다. 사랑이 밥을 먹여주지는 못한다. 그러나 바로 어디 쓸 데가 없기 때문에 사랑은 지속된다.

   언어 또한 사랑과 같다. 아니 사랑이다. 언어, 즉 문학의 본질은 유용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무용성에 있다. 대중문학과 순수문학이 나누어지는 것도 여기다. 대중문학은 보다 많은 사람들, 즉 대중이 좋아할 코드를 위해서  봉사해야 한다. 상업성과 만나는 그 지점에는 대중의 눈높이라는 유용성이 우선한다. 순수문학은 그 어느 유용한 목적을 위해서도 봉사하지 않는다. 무용한 언어, 그것만 생각한다. 그러나 무용한 언어는 생각보다 힘이 세다. 사랑의 힘이 큰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진지하게, 열정을 가지고 사랑하라. 열정의 내부에는 무모함이 있다. 그러니 무모해져라. 우리 인간의 무모함에는 제어능력이 있으니 걱정은 말라. 자기가 기르고 싶은 언어를 심어라. 그리고 울고불고 하며 길러라. 언어는 자신이 믿는 대로 자란다. 콩 심은데 콩 난다. 시는 언어로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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